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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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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자음과모음(이룸)

이승우 지음

2009-11-29

대출가능 (보유:2, 대출:0)

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프랑스 문단과 언론의 찬사를 받은 작가, 이승우!

우린 왜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가.

도대체 죽어서도 존재하는 아버지란 누구인가.




떠나고, 버리고, 뿌리치는 아버지

찾도록 운명지어진 아들

허위에 찬 사랑마저 거부당한 아들



“아, 씨발, 아버지라니…….”



아버지와 아들의 구원.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라는 우로보로스

그 이면의 심층, 코스모스를 들여다본다




근 삼십 년간 '한국소설로는 흔치 않게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색채로 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천착'하며 '독보적인 성취를 거두어' 온 작가 이승우. ‘지성미知性美 넘치는 글로 프랑스를 홀린’ 문학적 근본주의자, 이승우의 신간 화제작!

『한낮의 시선』은 렘브란트의 시선으로 맞닿은 깊은 사유와 진중한 문체, 절묘한 명암의 배합 같은 인물의 뛰어난 내면 묘사와 치밀한 사건 구성이 압권을 이룬다. 작가 이승우는 『말테의 수기』끝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며 치열하게 물음을 던진다. 아버지를 찾는 아들과 그 아들을 부정하고 뿌리치는 아버지……. 그 불편한 관계의 심층을 재조명하며 도대체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는 형이상학적 소설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모른 채 성장한 주인공은 결핵에 걸린다. 서울 근교 전원주택에서 요양하던 주인공은 심리학을 전공한 노교수를 만난다. 주인공은 노교수와의 대화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는데……. 주인공은 결국 나바호족의 쌍둥이처럼 아버지를 찾아간다. 찾도록 운명지어진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을 거부하고 주인공을 뿌리칠 뿐이다. 철저한 환멸과 완전한 절망을 느낀 주인공은 '노트 가득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행위로 아버지를 살해한다. 주인공은 그날 아침 자신의 객혈을 확인한다. 자신 속에 오랫동안 담아뒀던, 무언지도 모르는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비워낸 것처럼 개운해한다. 터널을 막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결핍의 진앙인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아버지라는 존재의 모든 구속을 단절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사랑해 줄 유일한 신과의 완전한 교감을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절대자(God)에게 더 나아가려는 구도자의 소설이라 명명해도 될까. 한 장 한 장 읽어 가다 보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과 조우하며 융합된다. 더 이상 모퉁이가 낯설지 않다. '한낮의 시선'으로부터 주인공은 자유하다. 독자도 자유, 하다.





편집자 리뷰

누구인가. 오직 그 한 분은 누구인가.




시선 하나 ― 어머니(한길숙).

아버지를 몰아낸, 아버지를 키운 울타리, 울타리 안의 정원.




주인공에게 완전한 배경이 되어준 존재다. 결핍감을 느낄 기회를 주지 않은, 울타리이며 울타리 안의 정원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가끔 공허'를 느낀다. '울타리는 튼튼하지만 허전하고, 울타리 안의 정원은 풍요롭지만 쓸쓸'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전적인 헌신과 철저함으로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필요를 몰아내고 무화한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어머니이며 아버지인 존재다. 그래서일까. 역으로 부성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초청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 이 땅에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버지(남편)라는 기억으로부터 달아났던 어. 머. 니.



시선 둘 ― 아버지(기호 2번. 영화농장 공동대표).

떠나고, 헤매고, 버리고, 뿌리치는 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지 않는 존재. 죽기 전에는 없어질 수 없으며 죽어서도 죽은 채로 존재하는 존재다. 주인공의 가슴 한복판을 가시 박힌 듯 뜨끔뜨끔하게 하는 존재이며 무시하려 했지만 무시되지 않는 존재다.

그의 존재는 주인공의 안락감을 공격한다. 잣나무 향 천내 숲은 안락감은커녕 두려움을 내쏜다. 모퉁이에 숨었다가 불쑥 튀어나와 공격을 해 올 같은 그는 주인공의 아버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말하는 아버지. 말로만 존재하는 단호한 존재이면서 광야로 나가고, 떠나고, 헤매고, 버리고 뿌리치는 존재이다. 자유로움에 들려 있으며 주인공을 끝없이 억압하며 배척한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한낮의 시선'이다.

그는 찾아온 아들을 환영하고 잔치를 벌이질 않는다. 그는 주인공에게 열어야 할 방문처럼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끊임없이 여는데도 내 방이 아닌 아버지일 뿐이다. 주인공을 몰아내고 뿌리치며 심지어 가두기까지 한다. 아버지의 집은 주인공을 거부는 곳이며, 주인공을 사랑해 줄 오직 한 분은 울타리 밖 천내 숲에 있다. 집이 아니라 집 밖에 있다.



시선 셋 ― 주인공(한명재).

나는 왜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가.

― 나바호족 쌍둥이 전사.




주인공은 불시착, 표류하는 이방인이었다.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이방인이었다. 그곳에서라면 존재할 수 있을 같았다라고 고백한 주인공은 천내의 아늑한 숲길과 잣나무 향이 자연스레 그리워진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인구 3만의 작은 도시로 불러낸 이는 누굴까.



연인 P의 말대로 주인공을 이끈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집착이었을까. 아니면 메뚜기나 사마귀의 몸에 숙주 하는 연가시 같은 그 무엇일까. 그러나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주인공은 그것을 구별해서 떼어 낼 수 없다. 떼어 내려면 구별해야 하는데,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스로 그 욕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아버지란 이름을 받아들인 이상, 의식하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찾도록 운명지어진 자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이런 처지를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있다.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 이야기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찾아온 아들은 아버지 태양의 환영을 받지 못다. 아버지는 아들을 맞으러 맨발로 뛰어나오거나, 끌어안고 입을 맞추거나, 잔치를 베풀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그가 아들에게 기껏 한 말은 이것이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왜 나를 찾아왔느냐? 왜 나를 찾아왔느냐? 이다. 나바호족의 쌍둥이는 이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을 거쳐 온 것이다. 나바호족의 쌍둥이는 아버지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찾는 자, 찾도록 운명 지어진 자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만이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을 통과하며 아버지를 찾기 때문이다.



집은 이제 더 이상 주인공에게 아늑하지 않다. 주인공은 모퉁이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으므로, 그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버렸으므로. 그 시선을 찾아, 혹은 그 사건에 호출당해 광야로 나왔으므로.



시선 넷 ― 아, 씨발, 아버지라니…….



아버지는 어렵게 찾아온 주인공을 향해 약간 찡그린 얼굴로 울타리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한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있을만하냐. 언제까지 있을 건가'. 이것이 아버지를 찾아온 탕자 아닌 아들에게 한 아버지의 말이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아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아버지는 울타리 바깥에서 울타리 안쪽으로 사라진다. 울타리 안으로 향한 존재. 그곳은 아버지의 성역聖域이다. 아들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공간인 것이다. 그때 주인공은 풀썩 주저앉으며 금빛으로 빛나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농장 안을 본다. 그곳은 아들인데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 두려움을 낳는 모서리의 공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금기의 낯선 공간이다. 촘촘히 박힌 아카시아 나뭇가지에 새끼줄이 둘러쳐진 튼튼하고 견고한 울타리가 버티고 선, 아들을 거부한 아버지의 공간인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없는 선거 중이다. 선거는 안영화 여사의 남편이자 영화농장 공동대표인 아버지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모든 수단이 욕망을 위해 동원되는 세계이다. 싸우고 경쟁하고 부정하고 쳐내고 잘라내는 세계다. 아버지는 그곳에 몰입하며 발을 내딛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기 원했고 강요까지 한다. 아버지에 의해 지어지기도 하고 헐리기도 하는 존재가 아들임을 증명하려한 걸까. 심지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들을 울타리에 가두는 존재일 뿐이다. 주인공이 기대한 것은 소박하게도 자신을 긍정하고 끌어안고 붙드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제 주인공은 이 모든 게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자신을 부정하고 쳐내고 잘라내는 아버지를 역시 부정하고 쳐내고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 그동안 애를 써도 써지지 않던 글이 써진다. 객혈을 한다. 그것은 결핵균 같은, 연가시 같은 아버지를 환멸 덩이를, '한낮의 시선' 그 주체를 그날 밤 토해낸 것이다. 렘브란트의 탕자는 없다. 광야로 간 아버지도 결국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에 집을 짓는 존재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주인공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 환멸을 느낀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내 편에서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나는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라고까지 말한다.



시선 다섯 ― 안영화 여사의 영화농장, 공동대표 아버지의, 집

주인공은 저만큼 떨어진 언덕배기에 환한 빛을 본다. 그 빛은 아버지의 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빛은 나에게 자신 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주인공은 그 신호를 벗어나려면 빛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하고, 맞서려면 어둠을 털어내며 빛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주인공은 빛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내딛는다. 아버지의 집은, 울타리 안에 있다. 아버지의 집은 빛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 외곽에 켜져 있는 환한 빛은 아무 것도 깨우지 못하는 빛이다. 새삼스럽게도 그 빛은 어둠을, 아직 어둠이며, 더 오래, 어쩌면 영원히 세상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임을, 더욱 새롭게 부각시킬 뿐이다. 외곽의 환한 전등 불빛은 심지어 아버지의 방 안으로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전등을 보고 간 것이다. 그 전등은 나를 이끈 아버지라는 공허, 허위, 잔영, 텅 빔, 흑암일지 모른다. 주인공은 불빛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 집으로 들어간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귀에 대고 말한다. 저예요…… 왜 나를 찾아왔느냐? 그 말 말고는 못하나요? …… 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마라.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나요? 그 말밖에…… 그렇게 말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그러나 네가 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그게 누구든, 요구하지는 마라. 어둠은 그 말을 삼키지 못한다. 빛이거나 진리이기 때문일까.



이러한 이승우의 형이상학적 소설을 누구에게 비유할 수 있을까. 빛을 담은 렘브란트, 벨린스키, 들라크루아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세잔, 르누아르, 모네, 고흐라고 해야 할까.



시선 여섯 ― 『말테의 수기』

소설 끝부분에서 『말테의 수기』를 인용하며 탕자의 사랑을 언급한다. 탕자의 사랑은 자기감정의 빛으로 상대방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빛으로 상대방을 환하게 비추어 애인을 투명하게 빛나게 한다. 하지만 여인들은 탕자가 사랑한 것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탕자는 사랑만 할 뿐 사랑을 받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탕자가 사랑을 하면 여인들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되돌려 주려했다. 결국 탕자는 누군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되고, 사랑을 피해, 세상을 떠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랑이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탕자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런 어느 순간, 탕자에게 비로소, 사랑을 받는 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그게 어디에 기인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어쩌면 연가시 같은, 운명 같은, 자기도 모르게 이끄는 어떤 무엇이 아닐까. 부름 받음일까. 지명하여 불러준 오직 그 한 분일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인 오직 그 한 분일까.



탕자는 투명하고 환한 빛으로 자신을 감싸는 사랑을 해 줄 이가 누구인지 마침내 알 게 된다. 이제 탕자는 오직 그 사랑만을 갈망한다. 그러나 참으로 간절하게 신의 빛나는 사랑을 받고자 원하지만 그에게 이르는 길이 아득히 멀다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결국 탕자는 떠났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탕자 몹시 견딜 수 없어 한다. 여전한, 옛날 그대로 있는, 그를 떠나게 만들었던, 상투적이고 습관적이고 허위에 찬, 사랑이 변하지 않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탕자가 견딜 수 없어했던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 사랑받음이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탕자는 이제 확고해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사랑이 무의하고 오직 하나의 사랑만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는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비록 그 한분은 아직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더라도 말이다.



이승우는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를 빌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나 취지를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말한다. 어쩌면 『한낮의 시선』은 이승우가 쓴 『말테의 수기』일지 모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으킬 권리를 없다 라는 모든 책들의 협박. 더 나가지 마라. 거기서 멈추라. 멈추지 않는다면 위험이나 공허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협박. 이에 동조하고 겁이 많아서 위험한 일도 공허한 일도 경험하려 하지 않는 독자도 있다. 주인공은 이러한 생각들이야말로 자신이 겁쟁이임을 감추려는 교묘한 논리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런 생각을 한 주인공은 무엇인가 손에 옮겨 쥐는데, 그것이 반짝이면서도 뾰족한 것임을 인식한다. 주인공의 손에 들린 반짝이면서 뾰족한 것이 아버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을 꿈틀거리게 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혹시 그의 가슴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탕자에 나오는 상투적이고 습관적이고 허위에 찬 사랑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이처럼 고마운(?) 아버지는 아들에게 철저한 환멸과 완전한 절망을 준다. 아버지는 (비록 노트에 가득히 기록되는 방법으로) 살해당함을, 객혈로써 아들에게서 내뱉어짐을, 어쩌면 원했고 택했을지 모른다. 아들을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철저한 환멸과 완전한 절망을 떨쳐버린 아들. 철저한 환멸과 완전한 절망을 털어버린 아들. 주인공은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한 것인가.



시선 일곱 ― 천내의 숲, 오직 그 한 분 혹은 그 남자

아버지를 살해하던 날, 어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주인공은 경험한다. 주인공은 이런 경험과 더불어 ‘내 속에 오랫동안 담아두고 있던, 무언지도 모르는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비워낸 것처럼 개운함’을 느낀다. 객혈을 한 것인데, 주인공은 ‘피가 아니라 묵은 찌꺼기인 것만 같다’라고 고백한다.



자신을 사랑해 줄 그래서 간절히 만나기 원했던 오직 한 분은 숲에 있다. 천내의 숲에 있다. 주인공을 사랑해 줄 오직 한 분은 울타리나 집이 아닌 어느 것 하나 깨우지 못하는 전등에 있는 게 아니라 천내의 숲에 있다. 단 하나의 결핍을 채워줄 오직 한 분이 말이다. 주인공은 글쓰기라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살해한다. 완전한 해방을 경험한다. 참 자유하다.



그동안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에게 거추장스러운, 짐짝 같은 또는 위험한, 선거에 방해가 되는 아들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으려 했기에 갇힌 불쌍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해 줄 오직 그 한 분은, 울타리 안쪽이 아닌 밖의 공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맞는 말일지 모른다. 절대자의 공간, 빛의 공간, 더 깊고 깊은 공간, 지성소의 공간, 울타리라는 휘장이 찢어진 천내의 숲에 오직 그 한 분은 존재했고,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는 살기 위해 오는 공간이 아니라 죽으러 오는 공간이라면, 천내 숲은 역의 의미를 지닌다. 치유,소생,회복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그래 일단 살아야 한다. 변명이든 진술이든 호소든 하기를 원하는 자는 일단 살아야 한다. 천내 숲을 거닐며 절대자의 충일한 임재를 경험하며 오직 그 한 분께 기도하기 위해서라도, 주인공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열납 되기 위해서라도, 그분과 거닐기 위해서라도……. 주인공은 천내 숲에서 오직 한 분을 따라 옷을 벗는다. 부끄럽거나 쑥스럽지 않다 라고 한다. 그 옷은 주인공이 받았던 상투적이고 허위에 찬 사랑, 오직 그 한 분의 임재를 마지막까지 차단했던 직물이며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꼈다는, 부정했다는 아니면 죽였다는) 원죄 의식일지 모른다. 주인공은 옷을 벗은 후 정신과 영혼이 말갛게 정화되는 느낌을 경험한다. 오직 한 분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천내 숲 그 남자처럼, '한낮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공허해 하지도 않는, 모퉁이를 두려워하거나 낯설어 하지 않는, 그 남자를 따라, 빛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는다. 주인공은 한없이 투명해진다. 몸이 무한히 공중에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한다.



오직 그 한 분과 거니는 천내의 숲은 기쁨과 자유함이 충만하다. 부끄러움도 수치심이 들지 않는 공간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은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깊은 곳,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라면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햇빛에 휩싸인 채 한 그루 나무처럼 다만 존재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아서 일까.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인구 3만의 변방 도시를 벗어난다.



P는 이때 주인공의 서른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주인공은 P의 상투적이고 허위에 찬 사랑 고백을 들어서가 아니라 앞서 말한 것을 깨달았기에 막 떠오른 신생의 태양이 연한 빛을 지상에 퍼뜨리기 시작했음을 직관한다. 오직 그 한 분의 사랑이 그와 함께 함을 고백하는 표증이다. 또 하나의 표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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